Friday, October 28, 2016

The Cranberries(더 크랜베리)의 노래 Zombie(좀비) 가사 해석

아일랜드의 유명한 록밴드인 The Cranberries Zombie 20년 전에 많이 듣었고 노래방에서 부르기도 했던 곡인데 무슨 내용인지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어제 우연히 다시 듣게 되었는데 여기서 좀비가 무엇을 말하는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그래서 하루 동안 조사하고 고민해 보았는데, 완전하게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가사가 상당히 상징적이라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가사 해석 사이트인 Lyric Interpretation에 올려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해에 많이 도움이 되었다.


Another head hangs lowly
Child is slowly taken
And the violence caused such silence
Who are we mistaken
(슬픔으로 인해) 또 다른 사람의 머리가 숙여졌다
(전쟁 또는 죽음은) 아이를 천천히 데려갔다
(우리는) 폭력 앞에서 침묵하고 있다
(전쟁을 남의 일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이 부분의 배경은 영국에서 1993년에 발생한 워링턴 폭탄 테러 사건이다. 이 노래가 발표되기 1년 전 일이다. 이 사건에서 아이 둘이 사망하고 여러 사람이 다쳤다. 첫 번째 줄인 'Another head hangs lowly'는 슬픔에 잠겨 머리를 떨구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다. 사람이 목 매달려 죽었다고도 해석한 사람도 있는데 배경이 폭탄 테러라는 점을 감안할 때 무리한 해석인 것 같다.

이 부분의 배경이 워링턴 폭탄 테러라고 판단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이 노래를 부른 The Cranberries는 아일랜드 그룹으로서, 당시 아일랜드 IRA와 잉글랜드 간의 분쟁이 잦았다. 공교롭게도, 이 곡이 발표되고 몇 주 후인 1994 8 31일에 IRA 25년 간의 분쟁을 종식하고 정전을 발표했다고 한다.
- 이 노래 2절에서 1916년이 언급된다. 이 해에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의 통치를 반발하는 이스터 봉기(Easter Rising 또는 Easter Rebellion)가 발생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전체적으로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간의 분쟁을 배경으로 한다.

'Child is slowly taken'은 워링턴 폭탄 테러에서 죽은 아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순수한 아이가 전쟁을 주장하는 의견에 천천히 물들어 가고 나중에 자신도 전쟁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고도 해석했는데, 그럴듯한 해석이다. 'And the violence caused such silence'는 폭력 앞에서 겁에 질려 침묵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반복되는 폭력을 남 일로 생각하고 언급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Who are we mistaken'은 아주 애매하다. 일단 문법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래서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일단 We are mistaken이란 말은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또는 우리는 실수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앞에 Who만 붙어서는 말이 안 된다. Who are we mistaken for라고 하면 우리를 누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가라는 뜻이다(, 우리가 실제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는데, 어떤 사람으로 생각되어진 것인지를 묻는 것). 또는 Who are we mistaken about이라고 하면 우리가 착각한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뭔가 잘못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것). 이런 식으로 전치사 for 또는 about 등이 생략된 것으로 보고 가사를 해석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가사 뒷 부분의 해석이 달라진다(그 반대도 성립).

나는 Who are we, mistaken으로 본다. , Who are we, who are mistaken?의 줄임말로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실수하고 있다라는 해석이다.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를 물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이 노래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인 Zombie와 이어지며, 우리는 좀비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묻는 것으로 해석된다. 좀비에 대한 해석도 매우 다양한데, 일단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하고 다음 가사로 넘어가자.

But you see it's not me
It's not my family
In your head, in your head
they are fighting
With their tanks and their bombs
And their bombs and their guns
In your head,
In your head they are cryin'
내가 아니야(전쟁은 내 일이 아니야).
내 가족이 아니야(전쟁은 내 가족과 상관없어).
내 머리 속에서
그들은 싸우고 있어(내가 생각하기엔 나의 싸움이 아니라 그들의 싸움이야).
그들의 탱크와 그들의 폭탄을 가지고
또한 그들의 폭탄과 그들의 총을 들고(싸우고 있어).
내 머리 속에,
내 머리 속에서 그들은 울고 있어(그들이 울고 있는 것을 전해 듣지만 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어).

이 부분의 해석도 참 애매하다. 위에 있는 대로, 나는 'In your head' '내 머리 속에'로 해석한다. 약간 억지스럽지만 좀 전에 나온 Who we are mistaken과 이후에 나올 Zombie를 내 식으로 해석하려면 '내 머리 속에'로 해석하는 편이 이해하기 쉽다. , The Cranberries가 우리에게 '당신의 머리 속에'라고 한 말은 내 입장에서는 '내 머리 속에'가 된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아일랜드, 또는 세계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폭력 앞에서 침묵하고 있다.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머리 속에는 그들끼리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와 내 가족만 안 다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실제 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과 책임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반전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한, 우리가 전쟁을 막기 위해 실제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한 전쟁은 종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우리는 좀비다.

In your head, in your head
Zombie, zombie, zombie
Hey, hey
What's in your head, in your head
Zombie, zombie, zombie
(그런 전쟁은) 내 머리 속에서(만 이뤄지고 있다)
(우리는) 좀비
내 머리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좀비

이 부분도 역시 애매하다. 가사를 간단하게 해석하면 In your head, (there is) zombie라고 보고 당신의 머리 속에는 좀비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 머리 속에 있는 좀비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이전 가사에서 탱크와 폭탄을 가지고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내 머리 속에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좀비가 된다. 그 사람들이 왜 좀비인가 하는 질문도 생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이 글 끝 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내가 하려는 해석은 아니므로 약간 억지스러울지도 모르지만 In your head Zombie를 별개로 보고, 내 머리 속에 전쟁 소식이 들려 오지만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생각 없이 살아가는 좀비라고 해석한 것이다.

Another mother's breakin'
Heart is taking over
When the violence causes silence
We must be mistaken
It's the same old theme since nineteen-sixteen
또 다른 어머니가 비통에 잠기고
가슴이 무너진다.
폭력 앞에서 침묵할 때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1916년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다.

'Heart is taking over'를 직역하면 마음이 (뭔가를) 가로챘다, 또는 획득했다, 또는 점유했다인데, 그런 식으로는 가사의 다른 부분과 잘 연관되지 않으므로 마음이 비통함으로 가득 채워졌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We must be mistaken' 1절의 'Who are we mistaken'와 관련된다. 'Who are we mistaken'의 해석이 그렇게 애매했던 반면, 2절의 'We must be mistaken'은 우리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확실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있기 때문에 1절의 'Who are we mistaken'을 약간 억지스럽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로 해석했던 것이다. 또한, 이런 해석이 있었기에 Zombie 부분을 '우리는 좀비다'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내가 택한 해석 방식은 여기까지로 하고, 다른 식의 해석을 살펴보겠다. 내가 좀비가 아니라, 내 머리 속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좀비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양측의 병사들은 전쟁주의자의 주장에 물들어 있고 윗 사람의 명령에 대해 의문 없이 전쟁터에 나가 서로 총질을 하고 있으므로 기계와 다를 바 없고, 좀비와 마찬가지다. 전쟁은 1916년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고, 그러한 전쟁주의 또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은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와 함께 사라졌어야 했건만 내 머리 속에 계속 살아 있다. 사라져야 할 사상이 머리 속에 남아 있으니 그런 사상은 좀비다. 구시대의 유물이다. 대대로 물려 받은 폭력의 역사를 죽이고 이제는 협력의 시대로 들어서자.

이런 식의 해석을 택할 경우, 'Who are we mistaken' '당신들은 나를 뭐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로 해석할 수 있다. , 전쟁주의는 사라졌어야 할 과거의 망령이고 좀비인데, 나도 그런 전쟁주의에 물든 좀비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냐하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 'it's not me' '나는 좀비가 아니다', 또는 나는 전쟁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In your head'는 내 머리 속이 아니라 '너의 머리 속'이 된다. 전쟁주의자인 너의 머리 속에서는 오랜 과거로부터(1916년부터)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사람들이 싸우고, 총질하고, 울고 있겠지. 'in your head, zombie, zombie, zombie', , 너의 머리 속에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이 좀비처럼 계속 어슬렁거리고 있어. 사라졌어야 할 전쟁주의 또는 군국주의의 망령이 네 머리 속에 박혀있어. 머리 속이 좀비로 가득찬 너 또한 좀비 같은 놈이고, 나를 너와 같은 좀비로 착각하지 마.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We must be mistaken'의 해석이 달라진다. 단순하게 보면 '우리가 잘못했다'는 말인데, 위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좀비가 아니므로 우리의 잘못은 없다. 따라서 'We must be mistaken' 'We must be mistaken for zombie'라고 확대 해석할 수 있겠다. , 전쟁주의자인 너희들은 우리가 좀비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구나. 아니야. 우리는 전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전쟁의 당위성은 네 머리 속에만 있는 허상이야.

조사해 보니 이외에도 수많은 해석이 있었다. PTSD(심적 외상 후의 스트레스 장애)를 묘사했다는 해석이 있는데, 전쟁의 잔혹함을 겪고 나서 내 머리 속에는 그 끔찍한 기억들이 좀비처럼 배회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심지어는 이 노래가 낙태를 반대하는 내용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하나의 노래가 천 명의 관객에게 전달되면서 천 개의 노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나름대로 느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라이브 버전의 링크를 아래 올린다.


Friday, April 8, 2016

무알콜 맥주 비교(시음, 후기, 평가, 금주): 클라우스탈러, 사그레스 프레타, 밀러 맥스라이트, 하이트 제로

술을 줄이기로 작정하다
나는 맥주 매니아로서, 매일 저녁 맥주를 즐겨 마셨는데 여러모로 몸이 안 좋아졌다. 그래서 무알콜 맥주로 음주 욕구를 달래며 최근 3주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맥주 음주량을 줄이거나 안 마시려는 분들을 위해 여러 무알콜 맥주를 비교, 소개하고자 한다.

무알콜 맥주 간략 비교
아래의 가격 정보는 옥션과 같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24캔짜리 박스로 구매한 것에서 한 캔당 가격을 계산한 것이다. 즉, 소량 구매하거나 편의점에서 구매하면 훨씬 더 비싸다. 맥주
맛과의 유사도는 나의 개인적인 평가이다.

* 가격 조사: 2016년 4월 8일 옥션에 등록된 상품들


에딩거 프라이

나는 마셔보지 못했지만 인터넷의 여러 평가를 보니 가장 맥주 맛에 가까운 음료 중 하나라고 한다. 하이트 병 맥주와 비교할 때 두 배의 가격이다. 가끔씩 기분 내기 위해 마시는 사람이라면 사놓고 먹을만 하다.







클라우스탈러

20캔 이상 마셔보았는데, 맛이 거의 맥주와 흡사하다(90점 주겠다). 무알콜 맥주라고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면 아무 의심 없이 맛있는 맥주라고 생각할 것이다. 캔당 1,365원으로서, 나 같이 음주 욕구를 달래기 위해 계속 들이키는 사람에게는 가격이 약간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래도 아래 다른 음료들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클라우스탈러를 추천한다.





사그레스 프레타

흑맥주와 유사한 음료인데, 맛이 상당히 맥주와 유사하다(85점 주겠다). 쌉싸름한 맛이 꽤 괜찮다. 꼼꼼히 음미해 보면 약간 맥주가 아닌 듯한 느낌도 들지만, 시원하게 해 놓고 들이키면 잘 모른다. 가격도 720원으로서 상당히 저렴하다.







밀러 맥스라이트

뭔가 맥주 맛과는 약간 다르다(78점 주겠다). 하이트 제로보다는 낫지만 같은 가격이면 사그레스 프레타를 마시겠다.








하이트 제로

맥주 맛과는 좀 다르다. 옥수수 시럽 맛이 좀 난다. 그래도 탄산음료로서 어느 정도는 맥주 맛이 난다(72점 주겠다). 이 제품의 특징은 알콜이 전혀 없고, 가장 싸며(500원), 편의점에서도 팔므로 쉽게 시음해 볼 수 있다(단, 편의점에서 사면 1,500원임).

위에 소개한 맥주 맛 음료들은 알콜 도수가 대체로 0.5% 정도로서, 조세법 상 1% 미만이므로 무알콜이라고 분류되는 반면, 하이트 제로는 정말 무알콜이다. 그래서 그런지 맥주 맛과는 거리가 있다. 참고로, 알콜이 들어간 다른 음료의 경우에도 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음주 욕구를 달래기 위한 나의 요령
나는 주로 저녁에 맥주 생각이 많이 나는데,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운동 후에 욕구가 클 것이다. 우선 냉장고에 무알콜 맥주를 두 박스 정도 채워넣는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먼저 맥주 맛과 유사한 클라우스탈러나 사그레스 프레타를 한두 캔 시원하게 들이킨다. 그런 다음에는 저렴한 하이트 제로를 저녁 내, 술 생각이 날 때마다 마신다. 많이 마셔도 비용 부담이 적고 칼로리도 낮다. 맥주를 마시면 칼로리 폭탄인 치킨느님이나 다른 안주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에 비하면 맥주맛 음료는 거의 물이나 마찬가지이다.

맥주맛 음료와 차를 계속 마시다보면 배도 부르고 시간도 늦어져서 잠자리에 들게 된다. 만일 그래도 맥주 생각이 난다면 한 캔 더 마신다. 요령이랄 것도 없이 계속 마시면 된다.

Wednesday, January 27, 2016

영화 '오토마타' - 과연 인간은 인공 지능을 영원히 지배할 수 있을까

오늘 영화 '오토마타(Automata)'를 봤다. 근래 들어 인공 지능에 대해 가장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에 케빈 위윅이 쓴 책, '로봇의 행진'을 보면서 인공 지능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영화가 인공 지능의 특성과 미래에 대해 매우 그럴듯하게 묘사했다는 것을 이 글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글에서 든 예들과 많은 내용이 케빈 위윅의 책에서 언급된 것임을 밝혀둔다.

인공 지능은 곧 인간 지능을 추월할 것이다.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1. 인간의 지능은 마법이 아니라 물리적인 인간의 뇌에서 나온다.
2. 뇌를 제외한 물리적인 장치를 통해서도 지능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이것이 인공 지능이다.
3. 인공 지능은 계속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 지능은 뇌라는 물리적인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4. 그렇다면 언젠가 인공 지능은 인간 지능을 추월하게 된다.

위 논리에서 1번 명제는 아직 증명되지는 않았다. 인간의 뇌는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번을 빼고 2번부터 논리를 시작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케빈 위윅은 인공 지능이 인간을 추월하는 시기를 2050년으로 보았다. 3번 명제도 완벽히 증명하기는 힘들지만 참일 것으로 여겨진다(아마 인공 지능 칩을 두뇌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두뇌의 능력을 확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공 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해 지면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이다.
인공 지능이 인간 지능을 추월하면 인류가 더 이상 인공 지능을 통제하기 힘들다. 케빈 위윅이 예를 든 대로, 지능이 뛰어난 인간이 침팬지들에게 잡혀서 사육을 당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침팬지들은 인간을 족쇄에 묶고 우리에 가둘 수는 있겠지만 언제까지나 인간이 순순히 사육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무기는 지능이므로, 어떤 기발한 방법을 쓰던 간에 조만간 침팬지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보다 똑똑해진 인공 지능이 언제까지나 인간의 통제 하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로봇 3원칙은 인간을 보호할 수 없다.
물론 인간이 순순히 인공 지능에게 백기를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공 지능을 통제하려 할 것이며, 그러한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다.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대충 보면 그럴싸한 원칙 같지만 실제로 적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제1원칙에서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어디까지가 그 '해'에 해당하는가? 아무리 선한 사람도 남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피해라는 것은 정의하기 나름이며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상적인 사람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로봇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예를 들어, 금융 회사의 인공 지능에게 이윤을 극대화하도록 주식과 각종 금융 상품을 매매하라고 시켰다고 해 보자(실제로 이런 시스템이 있다). 금융 거래를 하다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을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판단한다면 그 인공 지능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인공 지능이 내장된 미사일은 과연 제1원칙을 지킬 것인가? 목표에 가서 폭발하면 적군, 즉,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입힐 것인데 적군에게는 피해를 줘도 무방한 것인가? 또한 적군이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만일 군 사령관이 반쯤 미쳐서 아군을 목표로 미사일을 쏜다면 그 미사일에 달린 인공 지능은 군 사령관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국민의 안위를 위해 도리어 군 사령관 머리 위로 떨어져야 할 것인가?

종합하자면, 인공 지능을 통제하기 위해 각종 원칙과 규칙을 만들 수는 있지만 결국은 지능의 주체가 다양한 상황에 따라 가치 판단을 해야하며, 인공 지능이 내리는 결론은 그 인공 지능을 만든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인공 지능이 만든 사람보다 똑똑하다면? 도대체 그 인공 지능이 어떠한 가치 판단을 할지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하기가 매우 힘들다.

인공 지능은 인공 지능으로 통제해야 한다.
결국 인간보다 똑똑한 인공 지능은 다른 인공 지능을 이용해 통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특정 권한을 하나의 인공 지능에게 몰아 주지 말고 다른 인공 지능과 협의해서 진행하도록 시킨다. 이렇게 하려면 각 인공 지능은 다른 가치관과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인공 지능 심리학을 발전시켜 인공 지능들이 건전하고 균형잡힌 생각을 하는지 관찰하고 유도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도 인공 지능이 인간을 뛰어 넘은 후에는 사실상 완벽하게 인공 지능을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도 로봇 제2원칙을 로봇에 삽입할 수 있도록 설계한 주체는 인공 지능이었다. 그 논리 모듈은 인간으로서는 해킹이 불가능했는데, 인간의 이해 능력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적자생존 - 인간은 인공 지능에게 만물의 영장 칭호를 넘기게 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로봇은 새로운 세대의 로봇을 만들어 낸다. 이 새로운 로봇은 사람과 같은 팔다리를 갖지 않으며,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역에서 로봇끼리 살아가는데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갖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로봇들이 안면 덮게(마스크)를 스스로 벗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미래의 로봇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사람을 닮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의 통제 하에 있는 로봇이 아닐 것임을 상징한다.

인공 지능을 갖춘 로봇은 사람보다 훨씬 확장성이 높고, 어떤 면에서는 더 효율적이며, 특히 방사능 지역이나 우주에서는 생존 능력이 탁월하다. 아마도 인류는 인공 지능을 지구와 주변 우주의 상속자로 인정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Friday, November 28, 2014

노는 여자와 순결을 지키는 여자

부제: 여성의 성적 순결주의는 과연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합리적인 전략인가

요즘 20대 젊은이들은 자유롭게 성관계를 하는 것 아니었나?
일전에 아프리카TV의 인기 BJ인 쥬인 씨의 방송에서 채팅에 참가하다가 약간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나는 쥬인 씨가 예전에 남자 친구와 사귈 때 당연히 성관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꺼냈는데, 쥬인 씨는 이성 관계에서 성관계는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 했고 일부 시청자들도 이에 동의했다. 당시 나는 요즘 20대들이 아직도 혼전 순결주의를 가지고 있는가 하고 의아해했다. 사회가 점차 성적으로 자유 분방해지고 있다던데, 나보다 20년이 젊은 사람들은 내 세대에 비해 성관계를 훨씬 쉽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순결주의에 젖어 있다니...
나는 미혼의 성인이 성관계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건 상 성관계를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자신이 가진 보수적인 성관념으로 인해 성관계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한탄했다. 요컨대, 자유 성관계를 꺼려하도록 만드는 것은 전통적인 순결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을 통제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이고, 현대 여성은 더 이상 이러한 순결주의를 받아 들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성관계를 즐겨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순결주의가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일본의 행동생태학자인 오바라 요시아키가 쓴 '이기적 본능'이라는 책을 보고 나서, 나는 성관계에 대한 내 가치관이 편협했음을 느끼고 전반적으로 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성관계의 행동생태학적 의미, 즉, 어떤 방식으로 성관계를 해야 번식 성공도가 높아지는지, 그래서 진화에 도움이 될지 여부를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미혼이라 하더라도 성관계가 단순히 즐거운 놀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이 글에서는 '이기적 본능'에서 소개된 다양한 동물들의 번식 전략을 참고하여 현대 남녀의 연애 방식과 순결론 등의 가치관에 대해 살펴 보겠다.

명품백을 사달라고 조르면 된장녀?
일부 남성들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선물 받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 비난한다. 그것은 연애의 댓가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성매매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창녀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데, 문제는 소위 '된장녀'는 자신도 일종의 성매매를 하면서 전문적인 창녀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선물 요구는 배우자 선택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
일부 조류의 암컷은 짝짓기를 할 때 수컷이 얼마나 큰 먹이를, 얼마나 자주 잡아다 주는지를 살펴보고 가장 우수한 수컷을 고른다. 수컷은 열심히 먹이를 찾아다니다가 작은 것을 잡으면 아예 버리고 큰 것을 잡으면 암컷에게 가져다 준다. 이를테면 명품 먹이를 암컷에게 준다. 암컷은 큰 먹이를 가져다주는 수컷을 선택하는데, 이런 수컷은 번식 후 새끼를 키울 때에도 먹이를 잘 구해 올 가능성이 높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연애는 궁극적으로 결혼을 하기 위한 짝짓기 과정이므로 선물을 잘 하는 남자, 능력 있는 남자를 택하는 편이 본인이나 자식을 위해 바람직하다.

여자의 밀당: 진화생물학적으로 검증된 전략
데이트를 하면 손잡기, 키스하기, 애무하기 등, 소위 '진도'를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남자는 크게 관심이 없고 바로 성관계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여자는 가능한 천천히 진도를 나간다. 남자의 애를 태우면서, 남성이 얼마나 그 여성을 얻기를 원하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다.

일부 조류도 마찬가지로, 암컷은 금방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면 비교적 최근에 짝짓기에 성공했다는 이유 등으로 이 암컷에게 절실하지 않은 수컷은 포기하고 떨어져 나가고 절실한 수컷이 남는다. 역시 이러한 수컷이 향후 새끼 양육에 더 도움이 된다.

처녀막은 아주 쓸모 없는 조직은 아니다
처녀막의 유용성과 의미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처녀막은 여성이 첫경험을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처녀를 선호하는 남자를 위해 처녀막을 보존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첫 성관계 시 처녀막이 파열되면 통증을 느끼게 되므로 성관계 자체를 기피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특히 여성은 비교적 젊을 때에는 성관계로부터 크게 쾌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처녀막의 효과와 더불어 초기 성관계를 지연시킬 수 있다. 성관계를 지연시킬수록 좋은 배우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철모르는 시절에 철없는 남자와 관계를 맺어 미혼모가 되는 사태를 줄일 수 있다.

친자를 확신할 수 없는 남성의 비극
이상에서 살펴본 선물 요구, 밀당 기법, 처녀막 등은 주로 여성의 전략이다. 여성 전략의 핵심은 가족을 보호하고 자녀를 충실하게 키울 수 있는 아버지를 잘 고르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은 입장이 다르다. 남성은 자신의 자식을 낳아 줄 수 있는 여성을 골라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여성이 낳은 자식이 친자인지 확인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은 남성에게 없다. 일부 어류 중에는 그런 능력이 있는 종이 있다.

자식을 수십년 간 헌신적으로 키웠는데 친자가 아니었다면 진화 생물학적으로 남성 최악의 악몽이다. 진화 측면에서, 이는 완전히 인생을 헛산 것이고, 그 남성의 유전자는 대가 끊겼다. 따라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이런 어리버리한 남성은 점차 도태되어 사라진다.

성적으로 너그러운 남자 대 난봉꾼
극단적인 예로서, 두 종류의 남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A라는 남자는 너무나 관대해서 부인이 성적으로 자유롭게 다른 남자를 만나도 괘념치 않으며, 자신의 자식인지도 알 수 없는 아이를 정성껏 키운다. B라는 남자는 너무나 바람기가 많아서 이 여자, 저 여자 가릴 것 없이 관계를 하며 자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자 입장에서 A는 천국이고 B는 지옥이다.

그런데 진화 생물학적으로 어떤 쪽이 살아 남는가? 양쪽의 번식 성공도를 보면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A쪽은 자식 중에 친자가 아닌 아이도 있겠지만 자식들을 성공적으로 키웠고, B쪽은 친자는 맞지만 성공적으로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식들이 나중에 성공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후손을 많이 남길 가능성이 A쪽에 비해 낮다. 그래도 대략 많이 싸질러 놓은 B쪽의 유전자가 후대에 전달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질투는 남자의 힘
아무튼 남자는 친자를 보장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질투를 한다. 배우자가 어디에 가는지, 누구와 만나는지, 혼외 정사를 하는지에 대해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인간 여성은 포유류 중에서 성적 활발함이 최강이다. 1년 내내 발정기이다. 거의 남성에 맞먹을 정도이다. (이 역시 여성의 전략 중 하나인데, 이 글에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이기적 본능'에서 소개된 모 조사에 따르면 1981년 미국 여성 중 혼외 정사를 경험한 사람이 50% 이상이고, 아마도 일본에서 실시된 것으로 보이는 모 조사에 따르면 친자 판정 재판에서 18%가 친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여성의 질투는 그 목적이 다르다
친자 보장이 남성 질투의 목적이라면, 여성은 먹을 것과 지원이 질투의 목적이다. 남성이 혼외 정사를 하건, 혼외 자식이 있건 실질적으로 문제될 건 없다. 남성이 계속 충실하게 먹을 것을 구해오고 여성을 지원하여 자식을 잘 키우면 된다. 이런 차이로 인해, 능력 있는 남성이 여러 여성을 거느리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바라보는 순결주의
인간 성생활에 대한 진화생태학적인 측면을 살펴본 후 나는 순결주의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일단 순결주의는 남성의 친자 보장을 위한 것이므로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여성만 순결해야 하고 남성은 순결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것은 남녀 차별 아닌가 하는 질문은 순결주의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친자가 보장되면 여성에게도 이득이다. 남성이 육아에 더 충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동물의 예를 보자면, 일부일처제로 번식하는 캘리포니아 밭쥐는 수컷이 육아에 충실한 반면, 난혼제로 번식하는 몬타나 밭쥐의 수컷은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다.

덧붙임말: 인간은 인간인가, 동물인가
이상한 질문이다. 물론 인간은 동물인데, 동물적 본능에서 벗어난 듯한 이성적인 측면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성적인 부분도 사실은 유전자가 안배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인가. 예를 들어, 애를 낳지 않겠다는 나는 뭔가. 내 유전자가 종족 번식에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인구를 조절하여 종 전체를 보호하겠다는 목적을 달성한 것인가.

아무튼 앞으로는 성생활 또는 남녀 평등에 대해서 단순히 자유주의 또는 이성적인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측면에도 같이 고려해야겠다.

Tuesday, January 28, 2014

창녀 옹호론: 창녀와 정숙한 부인 중 어떤 쪽이 더러운가

한국에서 윤락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100만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심지어 해외에까지 진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그냥 현지에서 소비하는 부분이 많긴 하겠지만).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창녀를 비난하는 것일까? 창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폭력 사범이나 심지어 절도 사범과 비슷한 정도, 또는 그 이상이다. 나는 이렇게 창녀를 비난하는 사람의 심리와 근거를 살펴보고 그것의 불합리함을 설명하고자 한다.

매춘은 더러운 것인가?
창녀는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일까? 더럽기로 따지면 하수구 청소가 훨씬 더럽고, 힘들기로 따지면 공사장에서 벽돌 나르는 일이 훨씬 힘들며, 스트레스 받는 걸로 따지면 고객 센터에서 불만 응대하는 것이 훨씬 스트레스가 크고, 댓가가 과도하게 크다는 걸로 따지면 로또 일등 당첨된 경우가 훨씬 크다(이 경우,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댓가가 적지만 당첨된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댓가가 크다는 것이다).

내 주장의 한계
아래에서 나의 주장은 역사적, 사회적, 생물학적 검증을 거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주워들은 말과 나의 생각을 엮어 추론한 것이므로 일부 주장이 실제 사실과 다르거나 편협한 것일 수 있음을 먼저 밝힌다. 또한 매춘 남성과 매춘 여성을 통틀어 논의하고 싶지만 양측의 입장이 다르고, 나는 매춘 남성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기 때문에 매춘 여성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자유로운 성관계는 더러운 것인가: 남성 입장
창녀가 천대를 받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여성의 자유로운 성관계, 소위 '난잡한' 성관계가 더럽거나 부끄러운 것이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가 그렇게 가르친 이유 중 하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의 핏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가 누군지 혼동될 일이 거의 없지만, 아버지가 누군지는 항상 불확실하다. 그런데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남성들이 그런 불확실성을 순순히 수용할 리가 없고, 그렇다고 친자 DNA 분석을 할 기술도 과거에는 없었으니, 배우자인 여성을 감시하거나 교육을 통해 통제하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여성에게 강요된 정조 의식은 자신의 후손을 남기려는 남성들의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자유로운 성관계는 더러운 것인가: 여성 입장
정조 의식을 옹호한 사람은 남성만이 아니다.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구속하는 정조 의식을 옹호했다. 왜 그런가? 임신 중에 혼자 먹을 것을 구하기가 힘들고, 출산 직후에는 더 힘들다. 그래서 남성에게 말했을 것이다. 내 뱃속에 있는 자식은 어느 누구의 자식도 아니고 네 자식이라고. 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니 내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쉴 곳을 마련해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선뜻 내키지 않는다. 자신의 자식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남성의 신뢰를 얻기 위해, 여성이 장기간 동안 한 남성과만 성관계를 맺는 관습을 만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성은 이왕이면 무리 중에서 가장 뛰어난 남자를 택해 씨를 받기를 원했겠지만 임신 및 양육의 문제 때문에 좀 부실해도 자기에게 충실할 것 같은 남자를 택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이성과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약속, 즉, 결혼이라는 관습까지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조 의식은 여성의 생존 전략이자, 후손을 성공적으로 키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여성이 창녀를 더럽게 보는 이유: 귀한 고기를 순순히 빼앗길 수 없다.
당신이 여성이라고 치고, 당신에게 충실한 남성(예를 들어 남편)이 있다고 쳐 보자. 그런데 마을에 자유 성관계를 하며 댓가를 받는 여성이 있다면? 당신의 남성이 그 여성에게 놀러 가서 귀한 고기 조각을 나눠주고 왔다면? 그 창녀는 당신에게 상당한 위협 요소이다. 더구나 그 창녀가 매력적이라면? 그래서 당신의 남성이 정신을 빼앗길 지경이라면? 도저히 그 창녀를 두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제대로 된 일도 안 하며 고기를 얻어 먹는 여성이 있다니?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여 창녀를 마을 밖으로 좇아버리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이 창녀를 보는 시각이 나쁜 건 당연하다. 창녀가 더럽다는 생각이나 혐오감은 이런 실질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차차 발생하여 나중에 사회적인 관념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남성이 창녀를 더럽게 보는 이유: 창녀와 여자 친구를 혼동한다
이번에는 당신이 남성이라고 쳐 보자. 왼쪽 마을에는 창녀가 세 명 있고 산 넘어 오른쪽 마을에는 열 명이 있다. 왼쪽 마을에는 창녀 수가 적으므로 선택의 폭이 좁고 가격이 높다. 오른쪽은 그 반대이다. 예쁘고 매력적인 창녀가 더러 있으며 가격도 낮다. 어느 마을에서 살고 싶은가? 다른 조건이 같다면, 당연히 오른쪽 마을로 발길이 가는 것이 정상이고 합리적인데 굳이 왼쪽 마을로 가는 남성이 있을 것이다.

창녀에게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까울 수도 있다. 또는 창녀와 잠시 동안 사랑을 나눴는데, 그녀가 또 다른 손님을 받기 위해 나가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질투를 느낄 수도 있다. 성병에 걸릴 수도 있다. 이런 저런 불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게 창녀를 혐오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창녀에게 놀러간 것은 자신의 자유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창녀를 비난하는 이유는 정조 관념에 따라, 여러 남자와 성관계를 하는 여성은 더러운 여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 더러운 여성과 성관계를 한 자신은 뭔가? 같이 더러워지는 건 아닌가? 몸을 섞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전히 깨끗한 건가? 왜 먹던 우물에 침을 뱉지? 왜 자신이 안은 창녀를 더럽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 더러운 창녀를 안는 것인가?

다른 의문도 있다. 당신이 창녀와 사귀고 결혼하여 애를 낳을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왜 창녀에게 정조 의식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인가? 종족 번식과 무관하게 단순히 쾌락을 즐겼는데 왜 그 쾌락을 제공한 여성을 비난할까? 내가 창녀를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다보니 그런 남성들의 심리를 정확히는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이미 말한 대로 정조 관념에 젖어 있어서, 창녀가 자신의 여자 친구도 아니고 부인도 아니지만 여전히 정조 관념을 요구하는 것 같다. 즉, 창녀와 여자 친구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것 같다.

창녀와 정숙한 부인 중 어떤 쪽이 더러운가
성행위 자체는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다. 종족을 보전하기 위한 행위로서, 그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성관계 시 쾌락을 느끼도록 신경계가 진화되었으며, 일부 원숭이를 비롯하여 인간은 굳이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행위 자체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문제는 양육 때문에 발생한다. 수백 개의 알을 낳은 후 모래를 덮어주고 떠나 버리는 바다거북이와 같이 자식의 양육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정조 의식이 필요 없다. 인간은 워낙 복잡한 동물이라, 그 어떤 동물보다 길고 집중적인 양육을 해야만 자식이 생존하고 자립할 수 있다. 그러한 양육을 위해 여성은 많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얻는 이점을 포기하고 한 남성과만 관계를 맺고 그 댓가로 그 남성의 장기적인 지원을 얻게 되었다(여기서 '관계'란 성관계뿐 아니라 감성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모두 포함한다). 소위 정조 관념이 투철한 정숙한 부인이 탄생한 것이다.

얼마나 정조 관념에 빠져 있냐하면, 성폭행을 당한 여자는 몸과 정신이 더렵혀졌으므로 자살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식이 지구 곳곳에, 가까이는 조선에도 있었고 현대 한국에도 있다(물론 조선 시대에 피해자 여성이 다 자살한 것은 아니고, 일부 자살한 여자에 대해 주변에서 그녀의 높은 정조 의식을 칭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 출처: 조선 후기 성별에 따른 자살의 해석, http://medhist.kams.or.kr/2008/155.pdf).

애를 잘 키워보자고 정조 의식을 만들었는데, 애는 나 몰라라하고 자살을 하다니? 이런 과도한 정조 의식은 남녀 불평등이 극심한 시대에 여성을 하등하게 보는 남성의 횡포에서 기인한 것이긴 하다. 남성의 지배 이데올로기 분석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그만하고, 여성 스스로도 이러한 정조 의식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 가겠다.

반면, 창녀는 한 남성과의 독점적 관계에서 얻는 이점을 포기하고 많은 남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주로 물질적인 댓가를 받는 여성이다. 그렇게 얻은 재화를 가지고 노는 데 쓰던, 자식을 키우는 데 쓰던 자유다. 창녀와 정숙한 부인 중 어떤 쪽이 더러운가? 이 질문은 파란색과 빨간색 중 어떤 쪽이 더러운가 하는 질문과 비슷한 것 같다.


맺음말
내가 찾아본 바로는 창녀 비난의 근거는 창녀에게 정조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근거는 웃기는 소리라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다. 그것 말고 제대로 된 비난의 근거가 있을지 의문이다.

Saturday, June 29, 2013

펜션 관리자 체험기 2: 과부하

이제 수습 관리자로 일한지 3주가 지났다. 일을 꽤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자만심도 들었다. 이 정도 일 쯤이야 큰 문제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오늘 손님과 소나기가 몰려오면서 큰 코 다쳤다.

우리 펜션은 손님의 체크인 과정이 모텔이나 호텔보다는 복잡하다. 직접 객실까지 안내하고 주의 사항 당부를 하는 데 약 5분이 소요된다. 그런데 손님이 두 팀 이상 오면 뒤에 온 팀이 기다리게 되고, 나는 객실 안내를 나갔기 때문에 프론트에 아무도 없게 된다. 손님의 대기 시간을 줄이기 위해 두 팀 이상을 동시에 응대하다보면 어떤 일을 빼먹기 쉽상이다. 그래서 오늘 한 손님이 열쇠가 없이 복도에서 마냥 대기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잊어버리고 딴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 펜션에서는 저녁에 바비큐장을 운영한다. 개수가 제한된 테이블을 시간대별로 예약하여 손님들이 약 2~3시간 이용한다. 문제는 손님이 예약한 시간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고,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사용할 수 있는 테이블이 30%나 줄어버려서, 뒷 손님들을 모두 객실에 대기하도록 요청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서 어느 손님이 바비큐장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어느 손님에게 대기 요청을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어떤 손님을 먼저 오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언제 빈 자리가 날지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오시라고 말씀 드린 손님께 다시 전화하여 대기하도록 요청을 하기도 했다. 과부하, 뒤죽박죽, 시스템 다운, 어리버리, 멍 때리기 상태가 된 것이다. 게다가 체력도 바닥났다. 욕을 바가지로 먹게 생긴 상황인데 다행히 전임자가 상황 파악을 해 주어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을 겪으며 그 동안 오만하게 전임자에게 업무 효율화를 위해 큰 소리치며 절차를 바꿨던 것은 같잖은 일이 되어 버렸다. 과부화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 또는 효율화가 중요한 것이지, 평소에는 일을 어떻게 하든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Tuesday, June 18, 2013

펜션 관리자 체험기 1: 시작

오랜 동안 번역을 하면서 운동을 하지 않아 건강과 체력이 계속 악화되었다. 그래서 육체적인 노동이 포함된 일을 찾아보다가 운 좋게 펜션 관리자로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곳은 내륙 지방의 관광지에 있는 펜션 단지로서, 20여 개 객실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은 고객 응대, 객실 점검, 단지 내 정돈 등이다. 객실 청소나 조경은 각기 다른 분이 맡고 있다.


오전에 단지 내 마당과 도로를 빗질하면서 땀을 비오듯 흘린다. 마치 그 동안 쌓아 둔 나태함을 씻어 내는 듯하다.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고 그냥 묵묵히 빗질을 한다. 수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일을 계속하면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편안해질 것 같다.

직업으로서 좀 안 좋은 점은 한 주에 휴무 1일을 빼고 나머지 6일 동안 상주하면서, 잠을 자지 않는 동안에는 일을 하거나 손님의 호출에 대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기 시간까지 포함하면 하루 15시간이고, 주당 90시간이라는 상당한 시간을 투입한다. 자는 시간에도 숙박객이 전화를 하여 뭔가를 요청할 수 있으므로 원칙적으로는 24시간 대기이지만, 객실이 많지 않아 밤에 잠을 못자는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또한 평일에는 손님이 거의 없으므로 저녁에는 주로 쉬면서 대기하고, 주말에는 밤 늦게까지 고객 응대를 한다.

나의 건강이나 생활 습관 등의 상황을 고려할 때, 번역보다는 이 일이 좋은 것 같다. 장시간 근무 또는 대기를 해야 하므로, 일하는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